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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Stories/과학향기

수화도 번역이 되나요?… 시청각장애인 보조 장갑

by 사랑해,태진 2011. 4. 20.

“어서 오세요,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

패스트푸드점 직원이 명랑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하지만 메뉴판 앞에 선 여자는 말이 없다. 한참 뜸을 들인 여자는 입 대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화였다.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주문은 오랫동안 진행됐다. 청각장애인이었던 여자는 햄버거 주문마저도 이렇게 버겁게 끝냈다.

2000년 미국, 우연히 이런 장면을 보게 된 사람이 있다. 당시 17세의 고등학생이었던 라이언 패터슨(Ryan Patterson)이다. 청각장애인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그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누구나 수화를 읽을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라이언이 만든 기계는 골프장갑에 여러 센서가 붙은 ‘사인 변환기(sign translator)’다. 장갑에 붙어 있는 센서가 손가락을 구부리는 동작을 잡아낸다. 이 신호를 컴퓨터로 옮기면 알파벳으로 해석해서 모니터에 표시하게 된다. 장갑을 끼고 손동작을 하면 모니터에 글자가 써져서 하고 싶은 말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렇게 탄생한 최초의 ‘수화번역장갑’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2001년에는 인텔 ISEF(Intel International Science and Engineering Fair)에서 대상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발명품’이 됐다. 이후 여러 연구팀에서 조금씩 발전한 ‘말하는 장갑’을 내놓고 있다.

2003년에 선보인 ‘액셀러글러브(AcceleGlove)’는 장갑을 끼고 한 손동작을 말소리로 바꾸기까지 한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연구원인 호세 에르난데스 레볼라의 작품이다. 액셀러글러브는 장갑 표면에 소형 컴퓨터칩이 있고, 팔과 손에 연결할 수 있는 장치로 구성돼 있다. 수화 동작을 하면 팔과 손에 연결된 장치가 이것을 해석한다. 이 정보는 장갑에 있는 컴퓨터칩으로 전달돼 한 차례 변환을 거친 뒤 스피커로 나오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하는 장갑’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수화번역기’도 있다. 2004년 KAIST에 다니던 강효진 씨가 특허출원한 기계다. 이 기계는 기존에 장갑을 이용하던 방식의 단점을 보완해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상대방의 말도 문자로 변환해서 보여주므로 소통하기 한결 쉽다.

기존 장갑 모양의 수화번역장치에는 손 전체를 감쌀 수 있는 장갑에 모니터 같은 디스플레이가 연결된 선이 있어 크고 무겁다. 이 때문에 일상적으로 착용하고 다니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 청각장애인의 수화만 번역할 뿐, 상대방이 하는 말까지 문자로 바꿔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강 씨가 만든 수화번역기는 손톱에 붙이는 투명스티커 모양의 센서와 목걸이와 팔찌처럼 생긴 번역 장치로 구성됐다. 수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평상시에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팔찌 모양은 뗐다 붙일 수 있어 대화하지 않을 때는 따로 보관할 수도 있다.

강 씨는 수화를 배우러 다니면서 청각장애인들이 거추장스러운 수화번역기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청각장애인이 더 쉽고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2001년 인텔 ISEF에서 대상을 받은 라이언 패터슨의 수화번역장갑(좌)과 2007년 마이크로소프트 이매진컵에서 준우승한 핑거코드(우) 사진 출처 : 인텔,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시청각 모두를 쓸 수 없는 장애인을 위한 것도 있다. ‘핑거코드(Finger Code)’라는 장치다. 이 장치는 점자를 소리로 바꿔주고, 소리를 점자로 바꿔주는 기계다. 점자와 진동점자를 익혀야 알아들을 수 있기는 하지만 보고 듣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일반인과 소통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기계다.

핑거코드는 장갑과 핑거코드 프로그램이 설치된 컴퓨터로 구성된다. 컴퓨터에 말을 하면 문자로 바뀌고, 문자가 다시 아날로그 신호로 변해서 장갑에 전달된다. 장갑의 진동을 읽으면 상대방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반대로 장갑을 이용해 점자를 입력하면 컴퓨터에서 말소리가 나온다. 진동신호가 다시 문자로 음성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아직 진동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자나 음성인식 기술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진동점자와 점자를 익힌 사람도 드물다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로 시청각장애인의 소통을 돕는다는 점이 기특하다. 앞으로 부족한 점을 더 보완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덕분에 핑거 코드는 2007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주최한 이매진컵(Imagine Cup)에서 준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이밖에도 2010년 일본 교토대에서 개발한 ‘손가락문자번역기’와 중소벤처창업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던 ‘휴대용 수화번역기’도 있다. 이들은 기존 기술보다 한층 더 발전된 센서기술과 통신기술 등을 사용해 손가락 인식률을 높였다. 물론 제작비도 예전보다 훨씬 저렴해졌다. 이렇게 많은 연구자들이 꾸준히 연구하고 있으니 시청각장애인들과 무리 없이 소통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매년 4월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이날보다 꼭 하루 앞에는 늘 ‘장애인의 날’이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뻐만 하기보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도와줄 사람을 생각해보라는 뜻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박태진 동아사이언스 기자 tmt198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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