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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a Reporter/인터뷰

[도시사람들] 세계 일주 떠나는 ‘쨍쨍’한 에너지를 만나다

by 사랑해,태진 2020. 2. 26.

[사람의 표정] 영천에서 태어나 세상을 품은 여행가 특강, "최순자의 이야기쇼

 

10년째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쨍쨍, 최순자 선생님의 모습. 세계 각지에서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빛이 난다. 출처: 쨍쨍 블로그

 

저는 ‘쨍쨍’입니다. 최순자’이기도 하고요. 여러분은 어떤 이름으로 저를 부르고 싶으세요?”

 

2019720, 무인서점 <기억과 아카이브>에서 특별한 강연이 열렸다. 10년 전, 나이 오십에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와 세계 여행길에 오른 쨍쨍, 최순자가 펼친 여행 이야기쇼다. 강연을 열며 던진 질문은 청중과 보조를 맞추려는 그녀만의 가늠자였다. 쨍쨍을 고른다면 조금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최순자가 편하다면 약간은 고정된 틀이 좋은 사람일 거라 판단해 이야기 흐름을 조절한다는 것. 다행히 이날 강연장에 모인 사람들은 쨍쨍을 골랐고, 그녀는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더욱 자유롭게 발산하며 교사와 여행가, 딸이자 여동생으로서 삶 이야기를 풀어냈다.

 

영천시장의 골목대장, ‘놀이’로 교육하다

 

쨍쨍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시장에서 떡집을 운영하던 부모님 덕분에 영천시장 일대가 그녀의 놀이터가 됐는데, 사내아이들 모두 제쳐놓고 골목대장을 도맡았다. 여자아이였지만 워낙 배포가 크고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친구들이 그녀를 따랐다.

 

모두가 저를 좋아했어요. 종일 친구들과 시장 골목을 누비고 다녔죠. 노는 건 언제나 제가 일등이었습니다. 놀이는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할 때도, 세계여행을 할 때도 이어지고 있어요.”

 

영천시장의 유명한 떡집인 '청통떡집'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쨍쨍의 모습. 어렸을 적 그녀는 시장 일대를 누비던 놀이대장이었다. 출처: 쨍쨍 블로그

 

누구보다 잘 놀던 쨍쨍은 대구교대로 진학해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전개다. 하지만 그녀는 학교 현장에서 과연 쨍쨍다운 행보를 보인다. 교사로 처음 발령받은 경북 포항의 후포동부초등학교에서 대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 연극하고, 그림을 그리고, 파티를 열면서 수업시간을 채웠다. 이런 놀이중심의 교육은 학생들을 즐겁게 또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학교에서 공부는 않고 실컷 놀다가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지만, 돌아보면 훌쩍 자라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식이다.

 

대부분 보수적인 성향의 교사들은 쨍쨍의 별난 수업을 낯설어했지만, 쨍쨍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아이들로 길러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녀는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제발 다른 선생님처럼 수업하자고 울먹이던 학생도 있었다그런 친구에겐 창의적이고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 게 괴로웠겠지만 그런 것도 배우고 길러야 한다고 전했다.

 

딱딱하게 수업해 똑같은 아이들을 길러내는 수업에서 벗어난 쨍쨍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가 됐다. 졸업식마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나타나 교장과 교감을 당황스럽게 했지만, 아이들에겐 새로움을 주는 존재였다. 쨍쨍은 아직 제자들과 연락하며 지낸다. 여학생 중 하나는 쨍쨍을 역할 모델 삼아 세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러 갔다가 촬영감독으로 일하는 제자를 만나기도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이뤄낸 제자들을 자랑하는 쨍쨍의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야생마처럼 자유롭게 떠난 세계 여행길

 

야생마는 고삐에 메이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지요. 그래서 저는 나이 오십에 고삐 풀고 나와 세계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오십 년이면 반백 년. 이 세월을 살고 나면 대부분 지치기 쉽다. 무던하게 살고, 편안한 길을 걷고 싶은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쨍쨍은 이 나이에 사표를 낸다. 남부럽지 않게 안정적인 교사라는 직업을 관두고 세계여행이라는 도전에 나선 것이다. 그게 2009년의 일이니 올해로 10년째 세계 각지를 다니는 전문여행가로 살고 있다. 길 위에서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자유를 느끼는 집시의 삶이다.

 

쨍쨍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진다. 먼저 마음을 열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증명하듯이. 출처: 쨍쨍 블로그  

 

여성의 몸으로 세계의 온갖 곳을 다니는 게 두렵지 않을까 물었더니 노 프라블럼!”의 표정을 짓는다. ‘함께 놀면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신념이다. 영어가 서툴러도, 피부색이 달라도, 가난해도 부자여도 상관없이 함께 놀면 친구가 될 수 있다. 쨍쨍이 다녀온 여행들이 그 증거다.

 

쨍쨍이 교직에 있을 때부터 다닌 나라는 60개국이 넘는다. 온갖 곳을 다니며 기록한 글과 사진은 그녀의 블로그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2016년에는 여행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애인이 생기면 애인을 따라, 친구가 생기면 친구와 함께 떠난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책 한 권에 요약돼 있다.

 

책 속에는 저를 찍어놓은 사진이 꽤 많아요. 누가 찍어줬을까요? 모두 제 친구들이에요. 전 세계 아무나가 저의 전속 사진사인 셈이죠.”

 

선명한 분홍색으로 채워진 책의 앞뒤 표지에도 해변에서 뛰노는 쨍쨍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 역시 여행지에서 만난 아이들이 찍어준 사진이다. 카메라 다루는 법을 알려줬더니 신나서 찍어줬다는 그녀의 설명이 뒤따랐다. 편견 없이 어울리고 마음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쨍쨍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쨍쨍의 가족에겐 ‘방앗간이 놀이터’… 서로를 인정하는 삶

 

전 세계를 자유롭게 떠돌면서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어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만 하고 있을 오라버니 내외가 떠올라서입니다. 올케언니는 시집온 날부터 오늘까지 저희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부인데요. 떡집도 있고, 늙으신 어머니도 보살펴야 해서 여행 다니기가 쉽지 않으셔요. 그런 걸 생각하면 이 좋은 걸 나만 보면 안 되는데싶어서 눈물도 납니다.”

 

경쾌한 기운이 가득하던 쨍쨍의 이야기쇼가 잠시 먹먹해졌다. 고향에서 열리는 강연이다 보니 식구들도 청중으로 참여했는데, 이분들을 소개하던 쨍쨍의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 이 틈을 타 마이크를 넘겨받은 쨍쨍의 오빠가 잠시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영천시장에서 유명한 <청통떡집>의 사장님이다.

 

제가 순자 오래비됩니다. 자야는 저렇게 말해도 나는 방앗간이 좋아요. 이 나이가 되면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방앗간에 가면 돼요. 내 마음대로 놀 수 있거든. 순자한테는 세계가 놀이터지만, 저한테는 방앗간이 놀이터예요. 우리 순자 이야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9년 7월 20일 영천에 위치한 '기억과 아카이브'에서 쨍쨍의 이야기쇼가 열렸다. 출처: 기억과 아카이브

 

영천 사투리로 느릿느릿 전해준 말씀에 청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어진 삶을 긍정하는 자세에, 주변 사람부터 생각하는 마음에 모두가 뭉클해졌다. 자유롭게 세계를 떠도는 삶도, 나고 자란 고향에서 일하며 사는 삶도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환갑이 넘어도 쨍쨍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머물렀거나 들르는 이 도시에는 그런 진짜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귀한 이야기들을 만나는 기회에 감사하며, 쨍쨍이 강연 서두에 남긴 말을 전한다.

 

일본에 가면 이치고 이치에라는 표현으로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어요. 한자로는 일기일회(一期一會), 즉 이 세상에 단 한 번 있는 소중한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런 인연이에요.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만난 것도요. 여러분께도 인사드립니다. 이치고 이치에

 

 

2020년 2월 발행된 <도시사람들: 나는 소도시 영천에 산다>에 실린 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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