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힌트 한 가지 드릴까요?

사장님은요, 우리 누나 취향이 아니에요."

 
[밀양], 제 60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공식초청작, 이창동 감독, 송강호, 전도연, 쏟아지는 찬사 등에 더해 힌트를 한 가지 더 주자면 "박태진의 취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소재, 전도연과 송강호의 끝내주는 연기, 가슴 절절한 신애의 사연과 묵묵한 종찬의 보살핌이 한데 어우러져 볼 만한 영화가 탄생했으니 기쁜 일이다. 더불어 많은 이가 '용서'와 '구원'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이 또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다. (물론 이것도 못하는 영화가 많고 많지만;)

이 영화에는 '영화적임'이 뿜어내는 맛깔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영상, 현란한 음향, 절묘한 편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스토리의 전개도 그저 물에 물탄 듯 술렁술렁이다. 영화 속 장치가 은유하는 바를 찾는 것은 오히려 무의미하고, 손뼉을 칠만큼 절묘한 시츄에이션도 거의 없다. (딱 한 장면 있다 - '거짓말이야')

이야기는 흘러가고 있으며, 관객들은 지극히 수동적으로 신애을 바라봐야만 한다. 그녀의 슬픔, 그녀의 원망, 그리고 그녀만 찾지 못하는 비밀의 볕-종찬을 따라 2시간의 여행이 끝나면 당신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인물에 공감했거나 허리가 아파서.

구원, 용서, 그리고 나를 비추는 따뜻한 볕. 세상을 살면서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들임에 틀림없다. 영화 한 편을 통해 치열한 삶의 속도에서 벗어나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천천히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밀양]이 극찬을 받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영화'라는 장르를 선택했어야 했을까. 물론 배우들의 수준급 연기는 볼만했지만, 주제를 깊이 표현하고 넓게 대화하기에는 '소설'이 더 적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적 미학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 [밀양]은 "박태진의 취향"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영화적 철학'이 좋은 당신이라면 200%만족할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감각보다 이성이 어울리는 인물이다.

"사장님, 꽃 안 주세요?"
신애의 여동생이 결국엔 종찬의 편이 되었듯 [밀양]이라면 일정 부분 취향의 폭을 넓혀봐도 괜찮겠다 싶다.

선물
무지 오랜만에 홀로 극장을 찾았다. 졸업 2주년을 기념해서, 세 살을 맞은 나를 축하하며, 내가 나에게 좋은 영화 한 편 구경시키고 싶었다. 그만큼 많이 고민하고 고른 영화, [기담]. '1942년 경성 안생병원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셋'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 좋았던 영화. 오랜만에 영화다운 영화를 만났다. 한국영화 위기론아, 훠이훠이 물렀거라.


사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봉인된' 소녀와 묵묵히 외로웠던 의대 실습생, 박정남. 새 아빠를 사랑한 소녀와 그녀의 담당 의사, 이수인. 그림자가 없는 아내, 김인영과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의사, 김동원. 이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에 목마른 존재들이다. 공허한 정남의 마음에 싸늘한 시체가 들어 온 것도, 온 가족이 죽어 버린 소녀에게 의사의 손길이 각별했던 것도, 그림자가 없는 죽어버린 아내지만 곁에 두고자 하는 동원도 모두 사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가지의 기이한 이야기 속에 필연적인 사건 전개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할 수 있는 놀라운 어떤 이야기, 그것이 바로 [기담]이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 그것에 대해 영화가 당신에게 묻는다. 사랑을 좇아 할 수 있었던 무한한 일들, 그것들이 줬던 행복과 고통을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얼마든지 ‘기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사람

영화 속 영혼들은 말이 없다. 정남이 만났던 소녀의 영혼, 소녀가 만났던 엄마, 새 아빠, 할머니의 영혼은 소리는 있을지언정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말을 한다. 정남도, 소녀도, 수인도, 인영도, 동원의 모습을 한 인영도 모두 말을 한다. 그들 모두는 마음을 표현하고 뜻을 전달하려 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귀신이 되었다고 해서, 육신이 없다고 해서 표현할 마음도, 전달할 뜻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혼이 단지 사람들을 놀래려는 의도로 세상에 남았다고 한다면 그 존재의 가벼움을 어떻게 참을 수 있으리오.

결국 말이 없던 귀신들은 사람의 마음이 불러 낸 허상들이다. 우물에 빠진 수인이 살 수 있었던 마음의 힘이 바로 형님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정남과 사랑했던 소녀 귀신은 그의 쓸쓸함을 달래기 위한 존재였고, 소녀가 만났던 엄마, 새 아빠, 할머니는 소녀의 죄책감이 스스로를 꾸짖는 도구였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는 영혼을 작동시키는 주체마저도 인간이다. 영혼마저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쓸쓸하니까.


쓸쓸함
쓸쓸함이 인간에게 주는 공포. 인영이 혼자 했을 ‘그림자 놀이’를 떠올리며 검은 나비가 품었을 한에 대해 생각한다. 도저히 믿기 싫었을 동원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믿어야만 하는 쓸쓸함. 어쩌면 그런 것들이 영화 전체의 기술적 공포보다 더 커다란 두려움을 주는 것은 아닐까.

정전이 된 병원에서 촛불을 하나씩 나누어 들고 걸어가던 수인, 인영, 정남의 얼굴에 비치던 노란 생명의 불빛이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몫의 촛불을 지켜야 하는 세상, 그래서 쓸쓸하지만 그래서 도전할 만한 이곳에 슬픈 우리가 존재한다.

사랑이란, 사람이란, 그리고 쓸쓸함이란 것에 대한 슬픔이 있어서 여느 공포 영화보다 괜찮은 영화, [기담]이다.

1. 감독이 부러웠다, 얼마나 좋을까.
‘영화’라는 매체를 좋아하기 시작한 지는 고작 5년 정도. 따라서 과거 화려한 헐리우드 배우나 감독에 대해선 잘 모르며, 딱히 기억에 남는 장면도 없다. 대신 좋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보게 된 영화들에 대해선 최대한 느끼고 즐겼다. 물론 대부분 국내산이며 따끈따끈한 신작들을 보았으므로 감상의 폭이 좁기는 할 터이다. 그렇게 짧은 기간 좁은 폭의 영화들을 보았음에도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감독은 참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저런 이야기를 만들고, 필름에 담고, 찬찬히 정리하면서 감독은 적어도 수백 번 정도 외치지 않았을까, “영화를 만드니 좋지 아니한가!”라고.

특별하게 큰 줄기의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족을 중심으로 하나씩 가지치기하는 에피소드들은 굵은 감동 이상의 잔재미를 담고 있으며, 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 또한 쫀득한 맛을 더해준다.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러티브의 전달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좋고, 인물들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편집을 고민할 수 있어서 좋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꿈꾸는 세상에 대해 표현할 수 있으니 좋았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처럼 천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윤철 감독은 참 행복한 감독이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신나게 하고 있으니 좋지 아니할까?


2. 밥통과 커피메이커
솥과 뚜껑이 분리되어서 허리띠로 묶지 않으면 밥알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는 밥통, 그 모양새는 주인공 가족의 모습을 닮았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허리띠가 없으면 사방으로 튕겨져 제각각의 삶을 살 것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둥그렇게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달그락 거리는 숟가락이나 ‘물은 셀프야’ 이상의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대화가 필요해, 우린 대화가 부족해’라고 노래라도 불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십자인대 파열로 입원했던 엄마의 커피 타령으로 집에 최신형 커피메이커가 들어온다. 밥통의 자리를 떡 차지한 녀석 덕분에 밥그릇, 깨진 머그잔 등에 커피를 따른 가족들은 대화를 시작하려 한다. 때마침 일어난 정전은 역사적인 티타임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시도만으로도 가족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고,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니까.


늘 살기 위해 밥을 함께 먹었지만, 소통은 부족했던 가족에게 커피라는 매개체가 생겼다. 이제 용선이가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왜 한 집에 모여 살아야하는지를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밥과 커피를 마시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3. 있는 그대로, 지금 그대로 -
아빠도, 엄마도, 용선이도, 용태도, 이모도, 그리고 용구도 각자의 삶이 있다. 가족이라서 구속할 필요도, 모든 것을 알고자 파헤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들이 힘들고 지칠 때 가만히 손을 잡고 믿음과 용기를 주는 존재들이 되면 된다. 무덤덤하지만 언제나 내 편인 그런 사람들, 그것이 가족 아니던가. 있는 그대로, 지금 그대로 - 뒷면은 보여주지 않는 달처럼 다른 이의 앞면만 보면서 - 그렇게 살면 좋지 아니할까, 행복하지 아니할까? 영화 내내 신나게 웃고, 즐겁게 느꼈다. 참 부러운 감독님, 쌩유!


<마라톤>을 만들었던 정윤철 감독의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가족'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만들면서, 그것도 콩가루 가족인데도, 이렇게 무겁지 않게 그릴 수 있다니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영상에 담고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감독님이 여전히 참 부럽다. / 파란토마토


새롭다 그리고 매력적이다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물랑루즈'나 '시카고', '어둠속의 댄서'가 떠오른다. 그래서 처음엔 이 영화도 그런 지루하고 느끼한 영상과 음악이 펼쳐지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극장에 들어갔다. (물론 그 영화들이 전혀 지루하지도 느끼하지도 않다고 주장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나에게 위의 세 영화는 우울하고 지루하며 느끼했다.;;)

'삼거리 극장'은 달랐다. 똑같이 어두운 조명을 사용하고 노래와 춤이 나오는 영화였지만, 우울한 무언가를 다루었지만, 신나고 새로웠다. 놀라운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고, 기괴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으며, 화려하고 섬세한 조명들이 감정을 조율하는 '삼거리 극장'. 혹시 지금 극장으로 향할 생각이 있다면 주저말고 이 영화를 선택하기를 바란다. 유쾌한 판타스틱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활동사진을 보러 떠난 할머니를 찾아 삼거리 극장에 이르게 된 '소단'은 극장에 살고 있는 매력적인 유령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한다. 그들은 각자의 한을 풀어 놓으며 소단에게 이렇게 외친다. "울지마라 소녀야, 서글픈 사람이 세상에 너 뿐이더냐! 닥치고 춤이나 춰!" 이 유쾌한 대사 한 마디를 영화가 담고 있는 세계관이라고 하면 오버일까. 에리사 공주, 완다, 히로시, 모스키토는 과거의 한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나지 못해 삼거리 극장에 남았다. 하지만 이들은 유령으로서의 삶을 즐긴다. 심지어 '그들이 얼마나 거시기한가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도 현재의 삶을 즐기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우기남 사장이 만든 영화 '소머리 인간 미노수(米怒獸)'는 영화 속에서 우기남의 한을 담은 소재가 되고, 영화 밖에서는 전계수 감독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소재가 된다. 일제 시대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한 조선인의 삶을 건드리는 것부터 '쌀의 노여움을 받아서 탄생한 짐승'이라는 뜻의 미노수라는 이름까지(미노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스 왕'의 아들 '미노타우로스'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음악과 춤, 영상에 이어 이야기의 입체감까지 세심하게 살핀 영화를 보노라면 팽팽하게 불어놓은 예쁜 풍선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생긴 커다란 미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온통 산만하게 웃게 떠들 것만 같던 영화는 우기남 사장의 변화와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문 닫은 삼거리 극장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에리사 공주, 완다, 히로시, 모스키토, 소단, 그리고 우기남 사장. 그들의 환하고 밝은 웃음을 보며 다시 한번 모스키토의 말이 떠올랐다.

"
서글픈 자가 세상에 너 뿐이더냐, 닥치고 춤이나 춰!"

* 개인적으로 모스키토 역을 맞은 '조희봉'의 연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그가 맡은 세 가지 캐릭터(청소부, 모스키토, 박사)는 같은 사람이 연기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개성이 보인다. 삐에로 분장이 그렇게 멋진 것인 줄 이번에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ㅡ^

나도 이런 영화를 찾아다니며 보고 글쓰던 시절이 있었다. 맛있는 거 사먹을 돈은 없어도 극장갈 돈은 있었던지.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가며 극장을 찾던 내가 좀 그리운 요즘이다. 영화보고 글쓰기는 언제쯤 시작할런지. /파란토마토
우리는 모두 중심이 되기를 바란다.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최고가 되어야 하고, 그러면 더 큰 것을 이루어 세상에 중심에 서고자 한다. 남보다 멋지고 훌륭한 삶을 살고 싶은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인간은 자신이 지나온 하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설령 현재의 위치에 그대로 주저앉아 창백한 인생을 살게 되더라도, 보다 낮은 자리로 돌아가면 소박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말이다. 전세를 월세로 바꾸더라도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서울은 일종의 자존심이다. 그 욕망과 자존심을 다루고 있는 영화가 '라디오스']다. 번쩍거리는 '중심인'인 대신 이도 저도 아닌
'주변인'이 만드는 은은한 울림, 그것이 '라디오스타'다.

88년도 가수왕 최곤, 이름에 '최고'를 품고 있는 그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인물이다. 그의 주변에는 늘 매니저 박민수가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88년을 자존심으로 삼고 다시 한번 그 자리에 오르기를 욕망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자존심을 같잖게 여기고, 그들의 욕망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최곤의 자존심이 사고를 치던 날, 둘은 지방방송국 DJ가 되어야 했다. 스스로는 언제나 가수왕인 최곤에게 서울을 떠나 노래 대신 라디오 진행을 하는 것은 분명 추락을 의미한다. 현실과 괴리된 자의식이 현실과 맞부딪쳐야 하는 순간이 오고만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찾아간 그 곳에 이런 안내 문구가 붙어있다. '미래의 땅, 영월'.

현재의 한국을 사는 사람에게 미래의 땅은 서울이다. 젊음이 있고, 꿈이 있고, 치열한 삶이 있는 화려한 도시, 서울. 중심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을 갈망한다. 그래서 모두들 서울에 '가지' 않고 '올라간다'. 그런데 이 영화는 거꾸로 서울에서 영월로 '내려'왔건만 '미래의 땅'이라는 안내 문구가 보인다. 조그맣고 조용하고 뭐든지 천천히 흘러갈 것 같은 도시, 영월. 이곳이 미래의 땅인 이유는 최곤의 라디오 방송과 함께 밝혀진다. 오직 영월에만 방송되는 전파에 영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다방 종업원, 세탁소 주인, 청년백수, 고스톱 할머니 등 늘 주변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영월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서울에 올라가지 않아도 충분히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극중 록밴드, Easrriver는 그 중심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에 대해 보여주는 결정판이다.

방송이 인기를 얻자 최곤에게 다시 중심이 될 기회가 온다. 그를 위해 조용히 물러서는 박민수는 최곤에게 이야기한다.
'별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없다. 모두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그렇다. 세상 무엇도 혼자서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한다. 주변이나 중심이나 하나의 별로서 다른 별을 비춰주며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을 비춰줄 박민수가 없으면 빛나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최곤이라는 별은 계속해서 미래의 땅을 비추기로 한다. 김밥장수 할거라며 꾸역꾸역 눈물 젖은 김밥을 삼키던 박민수도 커다란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타나 최곤의 머리에 우산을 씌워준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주변인으로서 반짝반짝 빛난다.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에서 매니저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렇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번쩍이는 스타 뒤에서 한결같이 그들의 비춰주는 매니저, 끝까지 주변인을 끌어안고 보듬는 감독의 배려가 반짝반짝 빛난다. '곤아, 동강은 동쪽에서 시작해서 동강이냐, 동쪽으로 흘러가서 동강이냐?' 민수의 엉뚱한 질문 속에 감독이 숨겨둔 진리가 있다. 이유야 어쨌든 그것은 동강이므로, 어떤 운명을 타고났든 어떤 인생을 살아가든 당신은 당신으로서 중심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스스로에게 중심임을 잊지 말기를,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기를 귀에다 은은하게 울려주는 '라디오스타', 그것은 주변인이되 결코 주변인이 아닌 우리 모두를 응원한다.

'라디오스타'를 보고 극장을 나왔던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방 소도시에서 혼자 꾸던 내 꿈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지방이 중심이 아닐 이유가 없잖은가! 이 영화 덕에 난 주변인이 아니라 주인공이 됐다. 주변이 중심이 될 때까지, 꼿꼿하게 살겠다. /파란토마토

천하장사 마돈나
여기 7살 때 마돈나를 보고 반해 버린 남자가 있다. 그는 마돈나를 이상형으로 삼고 그녀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산다. 좀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이것이 마돈나에게 반했던 대부분의 남성들의 인생 이야기가 아닐까한다. 오동구만 빼고.

이름마저 씨름에 재능이 있을 것 같은, 씨름 선수의 몸매를 지닌 오동구. 그는 마돈나에게 반해 마돈나가 되고자 한다. 그녀를 처음 본 그 날부터 마돈나가 되는 그 날까지 동구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마돈나와는 정반대 편에 서 있을 것 같은 씨름 선수의 길까지 걷게 된다. 제작사 측에서 홍보한 그대로 '뒤집기 한판이면 여자가 된다'는 영화가 바로 '천하장사 마돈나'다.


보라색 샅바

교복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씨름을 하겠다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구는 장학금 500만원을 위해 씨름판에 뛰어든다. 그런데 '이름도 재능있네'라던 코치 선생님은 늘 화장실에만 계시고 무기력한 저팔계 3형제와 까칠한 주장은 동구를 본 척도 안 한다. 그래서 샅바를 빨기로 한 동구. 빨갛고 파란 샅바들을 열심히 빨고 있는데 저팔계 선배들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다음날부터 그들은 보라색 샅바를 두르고 씨름해야 했으니까. 

보라색 샅바는 동구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세상에는 파란색의 남자와 빨간색의 여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라색의 오동구도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동구가 샅바를 빨았고, 그래서 두 가지의 색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샅바 또한 청색과 홍색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제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끗이 빨고 조화를 이루어도 세상은 거꾸로 돌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보라색 샅바의 파격은 씨름판을 패셔너블하게 만들어 줄 신선한 아이템일지도 모른다.


"그냥 살고 싶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여러 동아리를 들락날락하는 동구의 친구가 동구에게 부럽다고 한다. 그래도 꿈이 있으니까 열심히 살 수 있지 않느냐고. 그런데 동구가 벌떡 일어나 외친다. '꿈이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 난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거대한 망치가 머리를 쾅 친다. '꿈이 잔인하다 그리고 그냥 살고 싶다.' 처음부터 무엇이었던 사람에게 그것이 되고 싶어서 좋겠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꿈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마돈나의 외침은 '성 정체성'을 이해한다던 우리의 가면을 완벽히 부숴 준다. 진정한 의미의 이해란 무엇인가.


행복이 뭔지 아니?

맨날 화장실에서 똥을 누시는 씨름부 코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도사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구를 제명시켜달라는 주장에게 '모두 저절로 굴러가는 거다'라는 말을 남기시며 낱말 퀴즈에 몰입하다가도 본능에는 충실해 늘 화장실로 선수들을 집합시키는 코치님. 그은 자신의 매력을 맘껏 뽐내면서 영화 속 감초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리고 결승전에 오른 주장과 동구를 화장실에 불러놓고 결정적 대사를 던진다.  '행복이 뭔지 아니? 지금처럼 심장이 쿵쾅거리는 거, 그게 행복이야.'


존재, 그 소박한 매력
 
오동구라는 존재,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고, 마돈나처럼 멋진 여자 가수가 되고 싶은 평범한 사람. 그를 통해 존재의 소박한 매력을 발견한다. 동구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 보라색 5번이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색깔은 무슨 색 몇 번인가. 그저 존재하고 그것으로 심장이 뛰는 행복을 느끼는 것, 그 매력을 위해 이 땅의 많은 이들이 웃고 울면서 달린다. 이렇게 '천하장사 마돈나'는 동구를 우리 개개인의 존재와 행복을 조명한다. 그래서 특별하고 소중하다.  

굳이 예전에 썼던 글들을 블로그에 올린다. 이 공간을 멋지게 일구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것을 열심히 표현할 작정이다. 앞으로도 많이 들러 응원해주시면 좋겠다.  / 파란토마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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