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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a Reporter/기자의 눈

당신은 ‘회의’만 좋아하는 회의주의자인가(2012.02.01.)

by 사랑해,태진 2012. 2. 1.

“국가 기밀인 K-1 전차 부품의 설계도를 미국에 빼돌린 국책기관 연구원이 검찰에 구속됐습니다. 이 사람의 범죄, 이뿐만이 아닙니다.”


연구자가 과학기술 보도가 아닌 사회부성 범죄 보도에 등장했다. 정년을 몇 년 안 남긴 55세의 한국기계연구원 소속 책임연구원 김 모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방위사업청이 육군의 주력 K-1 전차의 성능평가를 맡기자 설계도면을 미국의 한 부품업체로 빼돌렸다. 

또 2008년에는 부품업체 3곳을 차리고 가격을 부풀려 자신의 연구원에 납품하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이런 수법으로 지난 3년 동안 그가 챙긴 돈만 5억 6000만원. 여기에 납품업체의 성능평가 작업을 대신하고 7000여만의 뒷돈을 받기까지 했다.

일반 대중이 갖고 있는 ‘과학자’란 이름이 갖는 선량하고 공익적인 이미지에 흠집을 낸 충격적인 소식이다. 더군다나 국가 대표 연구기관 소속의 연구자란 점은 더욱 놀랍다. 묵묵히 진리를 탐구하고 우리만의 원천기술을 개발하려 불철주야 노력하는 이들들에겐 기운이 '쭉' 빠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과학기자’라는 명함을 갖고 있는 필자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과학기자는 회의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말이었다. 지난해 한 강의에서 선배 기자가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을 예로 들며 ‘과학기자의 회의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과학자와 일반인의 차이는 크게 없기 때문에, 그들을 포장하고 있는 ‘과학자’의 양심만을 믿고 과학자들의 말을 ‘절대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받아쓰는 것은 문제라는 내용이었다.

어떤 분야에 있든 기자는 취재원의 말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해야 독자에게 올바른 정보를 줄 수 있다. 그렇지만 필자가 운이 좋았던지, 실제로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과학자=믿을 만한 사람’을 더 많이 만났던 것 같다. 사실 일반인들에게도 과학자는 전문성을 담보하는 존재다. 전문적이고 복잡한 내용에 대해 명쾌하게 판단을 내려줄 사람은 오랫동안 그 분야를 연구해온 연구자라는 믿음이 강하다. 

그러나 세상사가 복잡하듯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들 전체를 하나의 성격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자의 성향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선량한 연구자들이 더 많겠지만, 이번 사건의 주인공처럼 자기 주머니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황우석 박사처럼 논문을 조작해서라도 명예를 높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회의주의’로 무장하지 않은 과학기자는 그저 자신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쓰이는 ‘나팔수’에 불과하다.

이런 이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독자들에게 더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서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연구에 대한 도덕적 가치를 판단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분야의 연구자를 통해 연구 성과에 대한 검증도 여러 차례 거쳐야 한다. 과학자 간 이해관계도 파악해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 과학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못 믿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네이처’는 ‘과학기자는 치어리더인가 감시자인가?’란 제목의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과학저널리즘의 역할을 소개하면서 ‘과학과 저널리즘은 서로 낯선 문화가 아니’라고 썼다. 결론에는 증거가 필요하며, 그 증거를 만인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점에서, 또 모든 것이 물음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과학기자는 물론 과학자도 끊임없이 질문하는 ‘회의론자’가 돼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이렇게 돼야 연구 투명성의 확보는 물론 대중의 과학이해를 높일 수 있다.

자, 당신은 ‘진정한’ 회의주의자인가, 아니면 ‘회의’만 좋아하는 ‘사이비’ 회의주의자인가.

박태진 기자 tmt198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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