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s a Reporter/기자의 눈

낙후된 신약개발 시스템만 탓할 것인가(2013.04.02.)

by 사랑해,태진 2013. 4. 2.

지난달 27일 대구시 수성구에 있는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DGMIF)’에 다녀왔다. 재단 산하 신약개발지원센터가 마련한 작은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재단에 대한 첫 이미지는 아직 건물이나 장비, 인력 등이 2% 부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신약 한 번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는 연구진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매달 한 번씩 개최하는 세미나의 이번 핵심 주제는 단백질 구조를 밝힌 뒤 신약을 설계하는 ‘구조기반 신약 발굴법’. 첫 세미나에서는 이지오 KAIST 화학과 교수가 초청됐다. 이 교수는 사람 몸에 있는 면역수용체인 ‘톨유사수용체(TLR)’의 구조를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10개의 TLR 중 구조가 밝혀진 것은 6개인데, 이 가운데 4개를 이 교수가 찾아냈다. 이 자료들은 TLR의 문제로 일어나는 각종 질병의 신약을 개발하는 데 기초로 쓸 수 있다. 

보통 면역작용에 이상이 생겨 일어나는 ‘패혈증’이나 ‘자가면역질환’은 TLR 단백질이 과하게 활성화된 경우가 많다. 만약 TLR 단백질에 활성화 신호를 주는 부분에 ‘딱 맞는 물질’을 설계해서 넣는다면 이런 질병을 고칠 수 있다. 구조기반 신약 발굴법의 원리다.

자물쇠의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거기에 딱 맞는 열쇠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과거 신약 개발은 자물쇠에 수많은 열쇠를 꽂아 본 뒤 효과를 살피는 방식이었지만, 요즘은 대부분 병을 일으키는 원인부터 파악하고 그에 맞는 물질을 합성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신약을 개발하는 게 생소하다. 단백질 구조를 밝히고 정확한 목표를 찾는 데 많은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는 X선결정학 장비나 핵자기공명분광학(NMR) 장치는 비싼 장비다. 선진국에서 이미 대중적인 방법이라도 장비가 없고 방법을 몰라 못 쓰는 형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안 그래도 낙후된 신약개발이 더 뒤처질 수밖에 없다. 

반가운 소식은 신약센터가 이런 장비를 대량으로 갖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핵자기공명분광학(NMR) 장치는 구입한 상태고, X선 결정학에 필요한 장비에 대해서도 고려 중이라고 한다. 최첨단 고가의 장비를 지원받게 된다면 아이디어가 있어도 쉽게 진행하지 못했던 신약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큰 신약 개발에 웬만한 규모의 기업은 보수적인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투자비가 많이 드는 장비 구매나 새로운 기법에 도전하는 등의 시도는 정부가 지원하는 신약센터가 한 발 앞서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빨리 빨리’를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특성상 앞으로 2~3년이 뒤면 ‘신약센터에서 어떤 성과를 냈나’로 평가하려 들지 모른다. 어떤 약을 얼마나 만들었는지를 기준으로 갖다 댈지도 모른다. 그런데 단기간의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미 십년 넘게 뒤처진 신약 연구개발 방법을 빠른 속도로 세계 수준에 올려놓는 게 더 중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신약에 도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는 일, 그게 신약센터에서 해야 할 일이다. 앞으로도 세계적인 신약개발 동향을 소개하고, 국내 제약계의 연구개발을 이끌어가는 중심에 신약센터가 서 있었으면 한다.

박태진 기자 tmt1984@donga.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