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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Factory/도서관

농촌을 조명하라, 농사꾼이 힘날 수 있도록!: 이시백 <갈보콩>

by 사랑해,태진 2020. 1. 3.

아부지는 농사꾼이다. 오십이 넘도록 자기가 나서 자란 마을을 일주일 이상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는 토박이다. 어려서부터 소꼴 먹이고, 모내고, 타작하고 그런 일들이 지금껏 그의 일상을 채워왔다. 사춘기 때 장성한 소 한 마리를 팔아 소니 라디오로 바꿔 온 게 그 삶에서 조금 어긋난 행보였을 뿐 늘 농사꾼으로 살았다.

 

아부지가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할 즈음 할배가 돌아가셨다. 할매가 살아계시긴 했지만 워낙 늦둥이로 태어난 탓에 나이고 뭐고 따질 여력이 없었다. 열 서너살 남짓의 눈빛 또랑또랑한 소년은 그날부터 한 집안의 가장이 됐다. 농사만 지으며 사십여년을 살아온 셈이다.

 
이런 아부지 아래 태어난 나는 농사꾼의 딸이다. 태어나 십오년을 여섯 집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중학교 다닐 즈음 시청이 있는 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농사꾼의 일상이 달라지지 않았다. 아부지는 여전히 소꼴 먹이고, 모내고, 타작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농사꾼의 가족의 삶은 조금씩 달라졌다. 엄마는 자식들 학비며 생활비에 보탤 요량으로 내가 사학년 되던 해부터 실 뽑는 공장에 나갔다. 한 달에 팔십 만원 정도 되는 돈은 매달 따박따박 돈 나올 구석이 없는 촌에서는 귀하게 쓰였다. 그런 변화 덕분인지 몰라도 우리는 다른 집 아이들처럼 농사일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육학년 정도면 논 몇 마지기에 모내는 일 쯤 너끈히 할 줄 아는 동네 친구들도 있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그저 간단한 소일거리 정도만 도왔다. 주말에 가끔 배추밭 잡초를 뽑거나, 감자 캐는 일을 하러 촌에 들르곤 했던 것이다.

 
농사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부지의 자금 사정이 어떤지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꿈에 그리던 방송일이 하고 싶었고 아부지도 늘 “니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셨으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이 년째 방송국 시험에 미끄러질 때도 “아빠가 힘이 없어서 그렇다”며 정작 떨어진 나보다 더 마음 아파했다. 그때 난 내가 한 뼘만 더 잘났거나, 꿈이라는 걸 꾸지 않았으면 좋았을거라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어찌어찌 도시로 나가 어쭙잖은 직장에 들어간 내게 아부지는 항상 훌륭한 지지자였다. 방을 구해야 할 때도, 차가 필요하다고 할 때도 늘 어디선가 돈을 구해 내게 부쳐줬다. 당신은 늘 허름한 옷을 입고 온몸에 파스를 바르면서도 딸자식이 외지에서 기죽을까 걱정이었다. 그런 아부지가 있는 내가 참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부지가 내 삶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과 달리, 나는 아부지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소를 기르는 아부지를 뒀지만 한미FTA 협상 때도 소비자의 입장을 생각하기 바빴고, 쌀 직불금 논란이 터져 나왔을 때도 정치인들 탓만 했다. 동네를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생긴다고 했을 때도 그저 무덤덤했고, 유기농 채소니 특용 작물 같은 소위 돈 되는 농사를 지으시는 게 어떻냐고 주제넘는 조언이나 했다.

 

이시백 작가의 단편소설집, <갈보콩>의 표지. 표제작은 GM 콩이 들어오면서 일어나는 농촌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시백의 소설집 ‘갈보콩’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못난 딸이었는지 깨달았다. 또 내가 얼마나 입으로만 떠들었는지 반성했다. 내 아부지와 동료의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들 앞에서 나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너져가는 농촌을 보는 내내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왔다. 오늘을 살고 있는 농사꾼들의 삶이 담담하고 세밀하게 묘사된 이야기를 읽으며 ‘이 작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첨단과학기술과 번쩍거리는 도시, 남녀의 사랑이야기 속에서 이야깃거리를 찾고, 소설로 쓰기 좋은 세상이다. 거꾸로 무너져 가는 농촌과 그곳의 끈적거리는 삶을 글로 그려낸다는 것, 그것도 이처럼 삶 깊숙이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낮은 데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낮은 데가 돼버린 우리 농촌을 관찰하고 덤덤하게 글로 쓸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이 사람이 농사꾼의 삶에 대해 가지는 애정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선거철만 되면 ‘농촌을 살리겠다’고 내거는 공약은 말 그대로 공허한 약속이고, 영화 ‘워낭소리’처럼 낭만적인 농촌의 삶은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렵다. 농촌 현실과 한참 동 떨어져 있는 농촌 정책이나 농촌을 주제로 한 영상물에 비하면 ‘갈보콩’이 얼마나 농촌밀착형 이야기인가. 풍자할 것이 많아 소설가로서 좋지만, 나라는 걱정이라는 작가의 말을 누군가 귀담아 듣고 개선해야 했으면 한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거친 식견이 때로 논리적이고 일견 바람직하다는 점에서 작가가 생각하는 농촌의 미래가 어둡지 않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낭만적인 시골’이나 ‘깨끗한 공기’를 내걸고 도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그래서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지방자치단체보다 농사꾼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바라보려는 소설 한 편이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농촌, 그리고 농사꾼의 삶이 직면한 갖가지 문제에 돋보기를 대고 살피고 있는 작가가 있어 참 다행이다. 농사꾼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또 그들이 더 행복할 수 있는 세월이 빨리 오게 나도 돋보기를 대고 아부지의 삶을 관찰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그를 위해 작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농촌이 더 풍요로워진다면 좋겠다.

 

 

P.s. 충청도 사투리를 그대로 가져다 쓴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제2외국어가 돼 버린 사투리’라는 표현에 공감하면서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문학에서라도 사투리가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내가 이 작가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 2011년 1월 27일 싸이월드 등록

- 2020년 10월 20일 티스토리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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