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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Factory/도서관

박주영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에 밑줄 긋기

by 사랑해,태진 2020. 3. 23.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시인은 스물한 살에 죽고 혁명가와 로큰롤 가수는 스물네 살에 죽는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시인도 혁명가도 로큰롤 가수도 아니다. 술에 취한 채 전화 부스 안에서 웅크리고 자거나 얼이 빠지도록 술을 마시거나 새벽 네 시에 도어즈의 레코트 불륨을 소리 높여 듣거나 하는 일도 그만 두었다. 생명보험에도 들었고, 호텔의 바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치과 의사의 영수증도 잘 챙겨서 의료비 공제를 받게 되었다. 이제는 스물여덟이니까."


나는 젊은 게 싫다. 지금도 충분히 젊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젊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젊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는 분명 있다.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할 수 없어지는 것들. 나는 그런 것들과 무관해지고 있는 내가 좋고 내 삶이 그런 것들과 상관없어지는 게 마음이 놓인다.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십 대도 아니면서 여전히 십 대의 정서로 살아가는 치기가 두렵고 우습다. 그 치기가 사실은 엄청난 열등감의 다른 모습임을 나는 안다. 나는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할 일을 시작하지도 않는다.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니라면 집착하고 싶지 않다. 좋아하지도 않는 것에 열광하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다.

 

<백수생활백서>에 실린 이정은씨의 일러스트레이션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무언가에 사로잡혔던 그때의 내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열광이 사라진 후 남는 공허보다는.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늘 안도한다. 뭔가가 빠져 있는 듯한 삶이지만 그걸 굳이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럴듯한 애인도 없이 자랑할 만한 직업도 없이 살고 있지만 나에게는 책이 있다. 추운 방에서 홀로 책을 읽으면서 지내도 누구보다 행복할 자신이 있다. 이 세상 어떤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으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걸 알고 있으므로 나머지는 의미 없다고 여긴다.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미루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내게 없어도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희랍어 ou topus(no place)라는 말에서 기원한다.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곳이란 뜻이다. 사람들이 묘사하고 설명하는 아름다고 질서 정연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그래서 행복하기까지 한 세상은 사람들의 상상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단지 미래를 표현할 뿐이며 순수한 이상을 구체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세상에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에 글을 짓는 사람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대. 산천의 구름과 안개, 초목의 꽃과 열매도 충만하고 울창하게 되어야 밖으로 드러나듯이, 마음속 생각이 충만하면 글은 저절로 써진다고."

 

소설이 될 만큼 멋진 인생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시시한 인생이라도 한 번쯤은 소설이 되어도 좋지 않은가, 라고 여긴다. 채린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아무리 연애소설이 흥미진진하다고 해도 자신이 하는 진짜 연애보다 흥미로울 수는 없다고. 그리고 유희는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책을 읽는 일이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쓰는 일만큼 재밌을 수는 없다고. 요즘 들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제일 아름다운 책들보다도 더 아름다운 인생이 있는 법이고 책이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인생만큼 재밌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 책의 주인공 서연은 세상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몇몇 밑줄 그은 글들처럼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독서' 외에는 하고 싶은 일도, 에너지를 쏟아야 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다.

 
사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점에서 그녀는 내가 좋아할 만한 인간상이다. 그러나 책 이외에 아무것에도 열정을 보이지 않는 그 태도에는 짐짓 실망했다. 나는 그녀와 달리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으며 그를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연에게 '단골이 득실대는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라는 배경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지금처럼 최소한의 노동만 하며 책 읽는 생활을 영위했을까. 결국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환경과 사회를 위해 조금의 에너지 정도는 나눠야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백수'다. 서연처럼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백수를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무신경한 인간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보다 기름진 삶터가 될 수 있도록, 그 구성원들이 꿈꾸는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아직 미약한 존재로 세상 한 켠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지만 언젠가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수생활은 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진행될 예정이다. (뭐, 그렇다고 서연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모두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는 셈이니까. ㅋㅋㅋ)

 

 

- 2009년 2월 16일 싸이월드 등록

- 2020년 3월 23일 티스토리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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